하이든·모차르트·베토벤은 왜 빈에서 활동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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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든·모차르트·베토벤은 왜 빈에서 활동했나?
  • abc경제
  • 승인 2020.02.27 23: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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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곡가 루트비히 판 베토벤(1770~1827)은 57년의 생애를 살았다. 올해는 그의 탄생 250주년. 고향인 본과 베를린을 필두로 유럽과 북미에서는 다채로운 탄생 250주년 축하 행사가 벌어지는 중이다.

독일 본 태생의 베토벤이 합스부르크 제국의 수도 빈(Wien)으로 온 것은 1792년 11월이다. 이후 그는 다시는 고향 땅을 밟지 않았다.

그가 처음 빈을 방문한 것은 5년 전인 1787년이다. 음악가로 성공하고 싶었으나 고향 본은 음악 환경이 따라주지 않았다. 그는 모차르트(1756~1791)가 활약 중인 빈에서 음악을 배우고 싶었다.

본에서 역마차를 갈아타고 장장 14일이 걸려 빈에 도착했다. 열일곱 무명 청년은 돔 가세 5번지 집에서 서른하나 황금기(期)의 모차르트를 잠깐 '알현'했다. 빈 음악계의 원로인 요셉 하이든(1732~1809)에게도 인사를 한다. 모차르트는 아버지뻘인 하이든과 스승이자 친구처럼 지내고 있었다.

베토벤은 빈에서 2주를 머물다 본으로 돌아간다. 고향에서 발버둥을 쳐보았지만 미래가 보이지 않았다. 본에는 자신을 이끌어줄 스승이 없었다. 5년 뒤인 1792년 고향을 떠나기로 결심한다. 하이든에게 사사(師事)하려면 빈으로 가는 수밖에 없었다. 모차르트가 눈을 감은 지 1년 뒤, 프랑스대혁명이 일어난 지 3년 뒤였다. 이 선택이 베토벤의 운명을 결정지었다. 모차르트가 1781년 고향 잘츠부르크를 등지고 빈으로 온 것이 그랬던 것처럼.

문명이 충돌한 중앙집권적 국제도시

왜 빈이었을까. 당시 합스부르크 제국은 중부유럽과 이탈리아 북부를 아우르는 유럽의 초강대국이었다.

제국의 수도 빈에는 서로 다른 문명이 모여들어 스파크를 일으켰다. 기독교 문명과 이슬람 문명, 게르만 문명과 슬라브 문명, 대륙 문명과 해양 문명, 유럽 문명과 동양 문명이 중앙집권적 국제도시 빈에서 한류와 난류처럼 만나 서로 뒤섞였다. 그 빈의 골목길 고샅고샅에 이국의 문화가 넘실거렸다.

빈은 세계음악의 수도였다. 마리아 테레지아 황제가 정책적으로 빈을 세계음악의 수도로 육성한 결과였다. 프리랜서 음악가 시장이 펼쳐졌다.

쾰른은 교회음악이, 라이프치히는 오르간 음악이, 프라하는 오페라가, 파리는 교향악단이 각각 발달했지만 빈은 이들 도시 모두를 뛰어넘었다.

재능 있고 야망 있는 음악가라면 누구나 빈으로 가서 음악 인생의 승부를 걸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이든, 모차르트, 베토벤, 브람스, 살리에리, 슈베르트가 18~19세기 빈에서 전성기를 보낸 음악가들이다. 슈베르트를 제외하고 이들은 모두 빈 태생이 아니었다.

빈의 거리에서는 헝가리 민요, 보헤미아 민요, 슬라브 민요, 이탈리아 민요 등 유럽 각국의 다양한 음악이 흘러넘쳤다. 그뿐 아니라 동방(東邦)인 이슬람의 음악도 쉽게 접할 수 있었다. 빈에서는 음악에 경계 같은 것은 없었다.

빈에서 어떻게 이슬람 음악이? 1683년 오스만 투르크는 발칸반도와 동부 유럽을 도륙하고 파죽지세로 중부 유럽을 향해 진격했다. 하지만 합스부르크 제국의 수도 빈에서 발목이 잡힌다. 몇 개월 동안 빈 요새 성곽을 포위한 채 공성전(攻城戰)을 벌였지만 빈 점령에 실패하고 퇴각한다.

이 과정에서 오스만 투르크는 빈에 이슬람 문화를 전파한다. 커피와 음악이 대표적이다. 1684년 빈에 커피를 파는 카페가 문을 열었다. 빈 카페 문화의 출발점이다. 투르크 음악 역시 대중에게 파고들었다. 빈에서 활동한 모차르트와 베토벤이 시차(時差)를 두고 같은 이름의 '터키 행진곡'을 작곡한 배경이다.

베토벤을 품어준 사람들

베토벤은 빈 생활 초반에 하이든을 사사했다. 하이든은 1년 2개월 동안 베토벤을 가르쳤다. 궁핍한 말년을 보냈던 모차르트와 달리 베토벤은 빈에서 귀족의 후원을 꾸준히 받았다. 대표적인 인물이 리히노프스키 공작과 로브코비치 공작, 루돌프 대공, 그리고 파스콸라티 남작이다. 리히노프스키 공작 집안과의 관계는 12년간 유지되었다.

당시의 귀족들은 음악가를 후원하는 대가로 그 음악가가 후원자의 취향에 봉사하는 활동을 강요했다. 후원자들이 원하는 것은 귀에 익숙한, 전통에 충실한 음악이었다. 하이든이 후원자인 에스테르하지 공(公)의 악장으로 매여 있었던 것이 대표적이다.

베토벤은 후원자에 종속되는 걸 거부했다. 후원자가 돈을 무기로 음악가를 마음대로 휘두르려는 걸 참지 않았다. 자존감이 높은 그는 귀족계층의 귀를 즐겁게 하는 음악은 거들떠보지 않았다. 권력자의 취향이 아닌 언제나 새롭고 자유로운 음악을 시도했다.

교향곡 5번, 운명 교향곡의 도입부를 떠올려보자. 귀족 사회에서는 도저히 용납하기 힘든 혁명적인 시도였다. 전통을 파괴한 혁신이었다. 충격이었다. 전통음악에 젖어 과거를 답습하던 귀족들이 반발했다. 하지만 젊은 층은 그에게 열광했다.

베토벤의 후원자 중에서 기억해야 할 인물이 파스콸라티 남작이다. 귀족 서열로 보면 저 끄트머리다. 황제의 용안을 먼발치에서 까치발을 딛고 보아야 하는 신분이었다. 그러나 그는 보통 귀족이 아니었다. 베토벤의 비범함을 알아보았다.

베토벤은 빈에서 35년간 살면서 80여 회나 이사를 한 것으로 유명하다. 천재는 예민한 감각을 타고난 사람이다. 한번 몰입에 빠지면 누구도 방해하는 것을 용납하지 못한다. 까다롭고 괴팍하다는 소리를 듣는 이유다. 베토벤이 특히 그랬다. 집주인과 갈등이 잦다 보니 집을 자꾸 옮겨 다닐 수밖에 없었다.

한 곳에 오래 정착하지 못하는 베토벤이었지만 파스콸라티 남작의 집에서는 세 번 살았다. 파스콸라티 남작이 그의 재능을 알아보고 그의 모든 것을 받아주고 포용했기 때문이다. 창조의 적(敵)은 지루함이다.

베토벤이 다른 집으로 이사할 때 그는 다른 세입자를 받지 않고 베토벤이 좋아한 방을 비워두었다. 언제든 원할 때 다시 오시라. 파스콸라티는 병상에서 가쁜 숨을 몰아쉬는 베토벤을 병문안했다. 빈 시당국은 베토벤이 머물다 간 집에 '전원교향곡의 집', '에로이카의 집' 등으로 표기했지만 이 집만은 다르다.

위대한 음악가를 알아보고 아낌 없이 후원한 귀족을 존중하는 의미에서 그의 이름을 붙였다. '파스콸라티 하우스'가 태어난 배경이다. 합스부르크 제국 620년간 얼마나 많은 귀족이 권력과 부(富)를 누렸겠는가. 그들의 99.99%는 아무도 모른다.

18~20세기의 사람들은 편지를 자주 썼다. 예술가들 중에서는 괴테, 베토벤, 고흐가 이른다. 그중 일부를 선별해서 '베토벤, 불멸의 편지'(예담)으로 2000년에 번역되어 나왔다.

 

베토벤은 산책을 좋아했다. 산책할 때는 언제나 안주머니에 오선지 노트를 넣고 다녔다. 언제 어디서든지 악상이 떠오르면 그 즉시 기록했다. 하일리겐슈타트의 들판을 산책하다가 무언가 생각이 나면 어디든 앉아 노트를 폈다.

평범한 사람도 가끔은 번득이는 생각을 할 때가 있다. 그러나 대부분은 그것을 메모해두지 않는다. 큰 성취를 이뤄내는 사람의 공통점은 메모를 자주 한다는 것이다. 놀라운 발상이란 별게 아니다. 대화를 나누다 혹은 산책을 하다 생각나는 게 있으면 수첩에 기록한다. 이렇게 축적된 메모들이 어느 순간 서로 뒤엉키면서 불꽃을 일으킨다.

1827년 베토벤이 영면했을 때 1만명 이상이 장례식에 참석했다. 빈 인구가 20만명이었다는 점을 고라하면 얼마나 많은 인파가 천재 작곡가의 죽음을 애도했는지를 짐작할 수 있겠다. 이것은 1791년 모차르트가 타계했을 때 그가 죽었다는 사실조차 몰랐다는 '치욕적 사건'에 대한 자성도 작용했다.

잠깐이나마 그린칭의 한집에서 살았던 당대의 시인 그릴파르처가 조사(弔辭)를 썼고, 오페라 가수가 조사를 낭독했다. 베토벤의 시신은 빈 교외의 묘지에 묻혔다.

빈 시당국은 슈베르트 링(Ring) 뒤편에 1880년 베토벤 광장을 조성하고 베토벤 동상을 세웠다. 그런데 그 위치가 절묘하다. 슈베르트가 다닌 학교 옆이다. 슈베르트는 베토벤을 숭배했고 자신이 죽으면 베토벤 곁에 묻어달라고 유언한 남긴 사람이다.

빈 중앙묘지에 음악가 묘역이 조성되자 베토벤은 1888년 이곳으로 이장되었다. 음악가 묘역에서 베토벤은 슈베르트, 브람스, 슈트라우스 등과 마주 보며 오순도순 이야기를 나눌 수 있게 되었다.

빈이 베토벤을 품지 않았으면 '베토벤 탄생 250년'도 없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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